[고영건의 교육나침반-특별기고] 586과 선악의 에고이즘

전교조와 586이 외치는 민주주의의 역설

  • 기사입력 2023.12.05 09:54
  • 기자명 OBC더원방송
▲ 고영건 (주)위키스터디 CEO
▲ 고영건 (주)위키스터디 CEO

문제적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Gott ist tot(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절대적 진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절대성의 폭력과 선악의 이분법을 초월할 새로운 도덕을 요청한다.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니체가 선포했던 ‘도덕의 초월’은 ‘선악의 에고이즘(도덕의 흑백논리)’에 갇힌 대한민국의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의 혐오로 치닫고 있다. 우리 정치가 ‘저질’, ‘삼류’ 소리 들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최강욱 전 의원의 혐오 표현은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진영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이다. 반성의 기미조차 없는 발언 당사자의 뻔뻔함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를 옹호하고 심지어 지지하는 다수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태는 한 줌의 도덕도 없는 무뢰배나 다름없다. 

586의 자기 확신: 전체주의와 집단의 비이성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저서 『혐오사회』에서 “증오하는 자에게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자기감정을 한번이라도 회의한다면 이성을 잃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증오 감정의 자기 확신은 집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증오 감정의 전염과 확산은 집단이 개인을 지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권력의지가 강한 개인일수록 집단의 증오 감정에 빠르게 편승한다. 강경파들의 주도로 혐오의 이미지가 적극 전파되고, 집단은 그들의 어떤 행동에도 면죄부를 준다. 작가가 분석하는 증오 감정의 확산과 혐오 폭력의 메커니즘은 지금 민주당과 강경파들의 행태와 동형구조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강성 팬덤 ‘개딸’들에게 충성 경쟁하듯, 혐오 표현과 거짓 선동의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그때마다 민주당과 그 강성 지지층이 보여주는 행태가 점점 더 도를 넘고 있다는 것인데, 이쯤 되면 이것은 심각한 사회병리 현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런 집단의 구조 때문에, 그 당사자는 사과는커녕 상대를 향한 혐오 발언을 계속해서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이것은 개인의 도덕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비이성 혹은 ‘전체주의의 악마성’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도덕적 한계를 넘어선 비난의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킨 최강욱 전 의원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생각났다. 아렌트가 목격한 아이히만처럼 그도 자상한 남편, 자애로운 아버지,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이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인권 유린의 만행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다. 이 사태를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비교하는 것은 분명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도덕적 결여를 만든 구조적 속성은 충분히 유비할 수 있다. 전범 재판장에 나온 아이히만은 자신의 끔찍한 행위를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명령에 충실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체주의의 악마성은 이처럼 개인의 가치판단을 마비시키고 행동 강령에 충실히 따르도록 한다. 지금 민주당은 연성 파시즘을 넘어 전체주의의 악마성을 드러내고 있다. 

586의 도덕 감성: 자기도취와 특권의식

21대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가 된 민주당은 급속도로 건전성을 잃어갔다. 합리적인 의견을 내는 개인에 대해 인민 재판의 퇴행을 보여주었다. 상식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 제1당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마주하며 본질적인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체 586들의 특별한 도덕 감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그 답은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 담론을 앞세워 누린 집단의 특권의식과 그 세대들이 성장하면서 받았던 교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고도성장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 덕에 그들은 부모 세대와 질적으로 다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절대적인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웠고, 배우지 못한 무지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들이 ‘대학생’이라는 선택받은 계급에 속하게 된 것은, 다른 이들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의 뜨거웠던 청년기도 노동자, 기업가 모두가 미래를 위해 치열한 속도전을 펼치던 시기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대한민국의 기적은 특정 세력의 전공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필부들이 땀과 눈물로 이룬 성과이다. 그러나 586으로 통칭되는 당시 운동권은 ‘민주화의 주역’이라는 훈장을 스스로 부여하며 선민의식에 눈먼 교조적 집단으로 새로운 기득권이 된다.

유신체제가 갑작스럽게 종식되면서 권력의 진공상태가 일어난 80년 초, 이른바 ‘서울의 봄’. 학생운동은 대결집의 동력을 얻었고,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호적수가 생겼다. 타도해야 할 더 큰 적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들은 이전 선배들과 다른 전략 전술을 준비했다. 그렇게 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586은 주역이 되었다. 80년대 학생운동은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고도화하였고 전국적인 전투 조직을 결성했다. 그것을 주도했던 ‘그때 그 사람들’의 페르소나는 아직도 그때를 그리워한다.

전교조와 586: 민주투사들의 비민주적 민주교육

586은 산업화의 성과로 부모 세대는 꿈도 못 꾸던 고등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이상적 사회를 꿈꾸며 학생운동 투사가 되었다. 어쩌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미 투사가 될 싹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중고등학교 시절 우상으로 여겼던 전교조 교사들의 좌경화 교육은 586에게 ‘참교육’으로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이념 주입 교육이 운동권 투사를 만든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80년대는 전교조 역시 반정부 운동의 장기전을 펼치기 위해 학교를 이념의 진지로 구축해 가던 상황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을 가장 잘 수행한 케이스가 대한민국의 전교조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더 이상 ‘기동전 전략’을 쓸 수 없게 된 전교조는, 학교를 진지전을 위한 이념 교육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전교조와 586의 연합을 가져왔다. 이후 그들의 진지 구축은 공교육을 넘어 사교육의 장으로 확대된다. 586 다수가 90년대 학원가에 침투하여 단시간에 사교육을 접수한 것이다. 학교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반일, 반미, 통일’ 등의 감성적 언어로 학생들에게 민중 의식과 ‘선악의 이분법’을 주입했다면, 학교보다 더 자유로운 학원에서는 586 투사들이 ‘미제국주의’, ‘재벌의 독점자본’ 같은 80년대 언어로 이미 사라진 적에 대한 증오 감정을 주입했다.

전교조와 586의 동맹이 만든 진지전의 성과는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 드러나 있다. 강성노조, 언론의 좌편향, 촛불혁명과 같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그것이다. 586들이 공교육과 사교육, 언론노조에 침투하여 확산시킨 친북, 반미, 반일의 좌편향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마저 뒤흔들고 있다. 전교조의 좌경화 교육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진보 진영 교육감들과 전교조는 범교과 영역인 민주시민교육과 통일교육을 친북 좌경화 교육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학생인권조례와 학생자치강화도, 민주교육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반민주적이다. 전교조가 주도하는 민주교육은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준법의 원칙’과 시민사회의 ‘절차와 합의’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한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인권 보호라는 미명 아래 공동체의 질서를 거부하고 시스템을 전복하는 ‘투사’가 되도록 부추기고 있다. 통일교육은 자유민주주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합의마저도 부정하는 ‘열린사회의 적(敵)’들을 양육하고 있다.

이분법을 넘어서야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많은 교육학자들이 민주시민교육의 지향점으로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말한다. 이념전쟁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절실하다. 그러나 민주시민교육의 방향만 바로잡는다고 해서 현장이 바뀌진 않는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인 ‘강제성(이념 주입)의 금지’와 ‘논쟁성 유지’는 전교조의 전횡이 계속되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집단의 비이성은 개인의 도덕성 함양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집단윤리 문제에 있어 그의 탁월함은 독창적인 해결방안에 있다. 그는 ‘가치가 다른 집단들의 힘의 균형’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한다. 니부어의 제안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면, 전교조를 견제할 합리적인 세력이 필요하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실천교육교사모임’이 보여주는 건전성은 희망적이다. 이른바 MZ세대의 뉴노멀이 적극적인 현실변혁의 대안이 될 필요가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586 정치인들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영화 정치’에 편승해 열을 올린다. 총선을 앞두고 대중들의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유용한 선거전략일 것이다. 민주당 강경파와 586이 영화가 주는 진한 향수에 취해 또다시 정신 승리를 즐기는 모습은 씁쓸하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울의 봄’의 향수가 아니라 본인들의 ‘선악의 에고이즘’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성찰의 시간이다. 더 늦기 전에 586에게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어보길 권한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왜곡된 의지와 도덕의 흑백논리에서 빠져나와 선과 악의 저편에 서는 자유인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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